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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불꽃 유관순

옥중투쟁과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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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투쟁과 순국
유관순열사기념관
옥중투쟁과 순국

유관순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체포되어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 재판을 받는다. 유관순, 조인원, 유중무(유관순의 숙부) 세 사람에게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이 선고된다. 수신․성남계의 주도자인 김교선, 이백하, 이순구, 한동규는 징역 2년, 김상철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받은 최고 형량이 징역 3년인 것을 보면, 유관순과 조인원, 유중무가 얼마나 치열한 법정투쟁을 벌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유관순이 마을 지도자들과 같은 중형을 받았다는 것은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도 4월 1일 공주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체포된다. 유관순과 유우석은 공주검사국에서 만난다. 남매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유우석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른다.

“(유관순) 오빠는 공주영명학교 다녔거든요. 오빠는 공주에서 만세 부르다가 학생대표로 체포되어 구치소에서 남매가 만났어요. 남매가 만나가지고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고 (오빠가) 물어보니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엄마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자기도 여기까지 왔다고……. 그래서 남매가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 간수가 떼어 놔서 생이별을 하고 말았죠.”

유정석(유관순 사촌동생)

당시 재판은 3심제도로 유관순과 주도자들은 경성복심법원(서울)에 항소하여 2심 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는다. 조인원과 유중무는 고등법원에 다시 상고했으나, 유관순은 “삼천리 강산이 어디면 감옥이 아니겠느냐?”며 상고를 포기한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재판 최종 형량

병천-동면계

병천-동면계 – 성명, 유관순, 조인원, 유중무, 김용이, 조병호, 김상훈, 백정운, 신성녀, 조만형, 박제석, 박봉래 정보 제공
성명 유관순 조인원 유중무 김용이 조병호 김상훈 백정운 신성녀 조만형 박제석 박봉래
형량 3년 3년 3년 2년 6월 2년 6월 1년 6월 1년 6월 무죄 8월 8월 6월

수신-성남계

수신-성남계 – 성명,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김상철 정보 제공
성명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김상철
형량 2년 2년 2년 2년 6월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당시 서대문형무소는 3.1운동 이후 수감자의 폭증으로 수용인원의 6배인 3천여 명이 수감되어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유관순이 수감된 여옥사 8호는 전국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었다. 개성의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심영식, 수원의 김향화, 파주의 임명애 등은 자신의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어윤희는 자신보다 체격이 큰 유관순에게 자기 몫의 밥을 나눠주고, 가족을 잃을 슬픔에 잠긴 유관순을 위로했다. 유관순이 믿고 의지했던 어윤희는 훗날 유관순에 대해 많은 증언을 남긴다.

“(유관순은) 그렇게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독립해야겠다는 정신뿐이었습니다. (중략) 나는 유관순 같이 충직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의에 사는 그 같은 순진한 사람을 다시 보지 못하고 이때까지 지냈습니다.”

어윤희
어윤희.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나란히 앉아 찍은 것으로 왼쪽에 유관순의 어깨가 보인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수시로 만세를 외쳤고, 그때마다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럼에도 자주 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 3월 1일 기념만세를 부를까요? 아주머니, 우리 만세를 부르다가 죽어도 괜찮지요? 의義를 위하여 죽어도 괜찮지요?”

3.1운동 1주년을 앞두고 유관순이 어윤희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다짐처럼 몇 번을 되뇌였고, 어윤희는 찬성하며 함께 만세를 부를 것을 약속한다. 벽을 두드리는 비밀통신방법인 ‘통방’으로 여옥사 전체에 연락을 취했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가 되자,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만세의 함성이 여옥사 8호를 시작으로 서대문형무소 전체에 울려퍼졌다. 유관순이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자 감옥 안의 모두가 만세를 외쳤고, 유관순은 간수에게 끌려가 심한 구타를 당해 방광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고문으로 얼굴이 부어있다.

1920년 4월, 영친왕의 결혼을 기념하여 형기가 절반으로 감축되었다. 유관순의 출옥일은 1921년 1월 2일로 예정되었다. 형기가 끝난 수감자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8호에는 유관순만 남게 되었다.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감옥에서 사망’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1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2

유관순의 제적부 기록이다. 유관순은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당시 입은 옆구리의 상처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다.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10월 12일 이화학당에 인도되었고 스승과 친구들에 의해 14일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우리는 그의 시신을 학교로 찾아왔다. 소녀들은 무명으로 수의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들은 유관순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 여겨 비단을 사다가 수의를 다시 만들어 입혔다. 그의 장례에는 동급생들만 참석하여 교회에서 조용히 지내야 한다고 허락을 받았다.”

지네트 월터(이화학당 교장)

유관순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30년대 일제의 도시개발로 묘지가 이전되는 과정에서 망실되었다. 이에 1989년 10월 12일 혼이라도 편히 쉬시도록 고향의 매봉산 자락에 초혼묘를 조성했으며, 매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은 추모제를 거행하여 숭고한 넋을 위로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한동안 잊혀졌던 유관순의 삶은 1947년 2월 28일 <경향신문>에 소설가 박계주의 “순국의 처녀”가 발표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진다. 같은 해 8월,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명예회장 조병옥, 회장 오천석, 고문에 김구, 서재필, 이승만, 위원에 정인보, 한훈, 최현배 등을 위촉했다. 기념비 건립, 영화 제작 등의 선양사업이 펼쳐졌으며, 1972년 생가와 봉화지가 문화재로 지정되고, 추모각을 건립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유관순 열사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 옛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받았으나, 공적과 상징성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서훈 등급 상향을 위한 국민청원과 특별법 제정 등 훈격을 높이기 위한 국민적 열망이 고조되었다. 이에 정부는 ‘3.1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정신을 길러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국민통합에 기여한 공로’로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 서훈한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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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9 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