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이 고향으로 돌아올 무렵 천안은 만세운동의 열기가 가득했다. 3월 14일, 목천을 시작으로 입장, 천안 읍내 장터 등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잇따랐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만세운동으로 일본 헌병의 감시는 더욱 삼엄해져 갔다.
유관순은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의 3.1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전국에서 일어나는 만세시위에 함께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조인원, 유중무, 유중권 등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아우내(竝川) 장날을 이용하기로 한다.
아우내 : ‘병천(竝川)’의 옛 지명으로 “두 갈래의 물이 하나로 어우러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백전천과 갈전천이 만나는 곳으로, 매달 1, 6일에 장이 열린다.
4월 1일(음력 3월 1일)이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정해졌다. 총본부는 지령리에 두고 시장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연락기관을 두었으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유관순과 유예도에게 연락원의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유예도는 몸이 약해 역할을 끝까지 할 수 없어 유관순만이 연락원의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유관순은 일제의 눈을 피해 이북 출신의 아주머니들이 그러하듯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주변 마을을 찾아다니며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약속받았다.
“고향에 내려가서 (만세)운동을 하려고……. 시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만세를 부르기 위해서 수건을 쓰고 다니면서 먼저 동장洞長을 만나서 지금 서울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운동을 해야겠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하자면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이용해야 한다고 역설을 해서 자기가 앞장서서 하겠다고 그랬대요.”
“그 때부터 나는 예배당에 드나들면서 조인원의 일을 도왔다. 조인원은 병천 장터에서 세 갈래로 손을 뻗기로 하고, 나는 천안 길목, 수신은 조만형, 진천은 박봉래가 거사에 대한 연락을 담당하게 했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홍일선의 발의로 수신면에서는 김교선, 이순구, 한동규, 이백하 등 젊은 청년들이 4월 1일 아우내 장날에 만세를 외칠 것을 결의한다.
“4월 1일, 피고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는 홍일선과 함께 아우내 시장으로 가서 미리 협정한 바에 따라 각자 시장 출입구를 장악하고 시장을 떠나는 사람을 막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고 했다. 시장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돌아와서 만세를 부르자고 선동하여 오후 1시가 지나서 조인원 등이 기획한 별개의 군중이 우선 만세를 외치자 피고(김교선 등) 및 시장이 있던 김상철은 그 집단에 가입하여 만세를 부르고…….”
3월 31일, 거사 전일 밤에 유관순은 매봉산에 올랐다. 달도 뜨지 않는 짙은 어둠을 뒤로 하고 내일의 거사를 위해 불을 밝혔다. 매봉산에 올린 봉화의 불빛은 멀리 퍼져나갔고, 각 마을은 화답의 의미로 함께 봉화를 올렸다. 활활 타오르는 봉화는 자주독립을 향한 의지이자 새 미래를 위한 다짐이었다.
거사일 이른 아침부터 유관순은 장터로 향했다. 장꾼과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오늘 독립만세를 부릅니다. 장터를 떠나지 마세요.” 말하며, 매일 밤 그려놓은 태극기를 손에 쥐어주었다. 훗날 유관순의 태극기는 재판에서 ‘범죄 공용물 1호’로 압수되었고, 판결문은 유관순이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오후 1시가 되자, 조인원, 김구응 등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이 먼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긴 대나무 장대에 태극기를 매달고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은 일시에 호응하며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큰 목소리로 만세를 외치던 500여 명의 군중은 점차 늘어나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소식을 접한 헌병들은 군중을 제지하고 만세운동을 중지시키기 위해 해산을 명령한다.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전진하던 기수(旗手)가 헌병의 검에 의해 희생된다. 이에 김구응이 헌병에게 항변하자 헌병은 총을 쏴 김구응도 그 자리에서 순국한다. 이 모습을 목격한 김구응의 모친 최정철이 대성통곡하며 헌병에게 “나도 죽여달라!”고 달려들자 헌병은 늙은 모친에게마저 칼을 휘둘렀다. 선두에 선 이들이 일본의 총칼에 쓰러지고, 유관순의 부모인 유중권, 이소제도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희생당한다.
사상자가 발생하자 시위 군중은 장터에서 50보 떨어져 있던 헌병주재소로 향한다. 유중무는 빈사(瀕死) 상태의 형 유중권을 둘러메고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항의한다. 헌병보조원 맹성호가 군중의 앞을 막자 “너는 보조원을 몇십 년 할 것 같으냐. 때려 죽이겠다.”고 말하고, 함께 있던 김용이는 “조선인인데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나와서 만세를 불러라.”라고 호통을 쳤다. 유관순은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주재소 소장을 붙잡고 항의한다.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하였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유관순이 소리치자 헌병은 유관순에게까지 총구를 겨누었다. 유관순은 자신과 군중을 향한 총기를 붙잡아 발포하지 못하게 한다.
헌병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중은 주재소에서 물러났으며, 일부는 헌병의 통신 연락선을 차단하고자 우편소의 전신주를 넘어뜨린다. 맨 손에 태극기만을 들고 시위행진을 한 군중을 향해 총칼로 무장한 헌병의 무차별한 공격으로 오후 4시가 넘어 시위대가 해산하게 된다. 판결문에 의하면 이 날 현장에서는 19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성명 | 주소 | 생년월일 | 사망월일 | 서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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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응 | 갈전면 가전리 | 1887-07-27 | 1919-04-01 | 애국장(1991) |
김상헌 | 수신면 복다회리 | 1893-07-08 | 1919-04-01 | 애국장(1991) |
박병호 | 동면 화계리 | 1875-01-05 | 1919-04-01 | 애국장(1991) |
박상규 | 병천면 탑원리 | 1880-07-20 | 1919-04-02 | 애국장(1991) |
박영학 | 수신면 발산리 | 1878-09-25 | 1920-07-07 | 애족장(1991) |
박유복 | 수신면 복다회리 | 1869-09-10 | 1919-04-02 | 애국장(1995) |
박준규 | 청원군 오창면 | 1863-03-06 | 1919-04-01 | 애국장(1991) |
방치성 | 성남면 봉양리 | 1874-10-02 | 1919-04-01 | 애국장(1991) |
서병순 | 병천면 병천리 | 1885-01-03 | 1920-08-11 | 애국장(1991) |
신을우 | 수신면 복다회리 | 1919-04-01 | - | |
유관순 | 동면 용두리 | 1902-12-16 | 1920-09-28 | 대한민국장(2019) 독립장(1962) |
유중권 | 동면 용두리 | 1863-11-02 | 1919-04-01 | 애국장(1991) |
유중오 | 동면 용두리 | 1888-03-15 | 1919-04-01 | 애국장(1990) |
윤태영 | 동면 송연리 | 1850-01-19 | 1919-04-01 | 애국장(1991) |
윤희천 | 갈전면 봉항리 | 1894-10-02 | 1919-04-01 | 애국장(1991) |
이성하 | 동면 수남리 | 1859-11-13 | 1919-04-01 | 애국장(1991) |
이소제 | 동면 용두리 | 1875-11-07 | 1919-04-01 | 애국장(1991) |
전치관 | 갈전면 도원리 | 1871-09-10 | 1919-04-01 | 애국장(1991) |
최정철 | 갈전면 가전리 | 1853-06-26 | 1919-04-01 | 애국장(1995) |
한상필 | 갈전면 매성리 | 1879-08-21 | 1919-04-01 | 애국장(1991) |